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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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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리 해방은 1944년 8월 25일, 연합군과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노력으로 파리가 독일의 점령에서 벗어난 사건이다. 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은 독일군의 라인강 후퇴를 목표로 했으나,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파리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샤를 드 골은 프랑스 제2 기갑 사단의 파리 진격을 강력히 요청했고, 8월 24일 자유 프랑스군과 미군이 파리에 진입했다. 독일군은 파리 방어를 시도했지만, 결국 항복했고, 드 골은 파리 시청에서 연설하며 프랑스의 해방을 선언했다. 파리 해방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연합군의 승리를 기념하며, 매년 8월 25일에 기념 행사가 열리고, 여러 영화와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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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해방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분쟁파리 해방
부분오버로드 작전의 일부
프랑스 애국자들이 샹젤리제 거리에 늘어서 있다.
1944년 8월 26일 프랑스 제2기갑사단의 행진을 보기 위해 샹젤리제 거리에 늘어선 파리 시민들
날짜1944년 8월 19일 - 8월 25일 ()
장소프랑스 파리와 그 외곽
결과연합군 승리
결과 상세파리 해방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프랑스 레지스탕스

교전국 2
비시 프랑스
지휘관
지휘관 1샤를 드 골
필리프 르클레르
자크 샤방델마스
레이먼드 O. 바턴
버나드 몽고메리
지휘관 2디트리히 폰 콜티츠}}
부대
부대 1프랑스 국내군
프랑스 제2기갑사단
스페인 망명자
미국 제4보병사단
부대 2제325보안사단
프랑스 민병대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프랑스 레지스탕스:
1,600명 사망
자유 프랑스군:
130명 사망
319명 부상
미국: 불명
영국: 불명
사상자 23,200명 사망
12,800명 포로

2. 배경

연합군의 전략은 독일군이 라인강을 향해 후퇴하는 것을 파괴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 앙리 롤-탕기가 이끄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무장 세력인 프랑스 국내군은 파리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팔레즈 포위전 (8월 12일~21일), 즉 오버로드 작전의 마지막 단계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연합군 원정군 최고 사령부의 최고 사령관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은 파리 해방을 주요 목표로 여기지 않았다. 미국영국군의 목표는 독일군을 파괴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을 유럽에서 종식시키고 연합군이 태평양 전선에 모든 노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3]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8월 15일 파리에서 독일군에 대항하여 봉기를 시작했지만, 연합군은 여전히 독일군을 라인강으로 밀어붙였고 파리 해방을 위한 전투에 휘말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연합군은 파리를 점령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4] 그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연합군의 공격이 있을 경우 도시에 대한 완전한 파괴를 독일군에게 명령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파리는 문화적, 역사적으로 너무나 큰 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파괴할 위험이 있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또한 스탈린그라드 전투레닌그라드 포위전과 같은 소모전의 장기전을 피하고 싶어했다. 또한 포위될 경우, 파리 해방 후 인구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매일 4000톤의 식량과 상당한 양의 건축 자재, 인력 및 엔지니어링 기술이 필요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기본적인 공공시설을 복구하고 교통 시스템을 재건해야 했다. 이러한 모든 물자는 전쟁 노력의 다른 지역에서 필요했다.

샤를 드 골은 연합군 군정이 시행되면서 연합군에 의한 군정이 프랑스에 시행될 것을 우려했다. 미국 참모총장이 계획하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승인했지만 아이젠하워가 반대했던 행정부였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골은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독일 점령군에 대항하여 봉기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바르샤바 봉기 동안 폴란드 레지스탕스에 일어난 것처럼 그의 동포가 학살되는 것을 허용하고 싶지 않았고, 즉각적인 전면 공격을 요청했다. 그는 프랑스 제2 기갑 사단 (2e DB)을 분리하여 아이젠하워가 승인을 부당하게 지연시킬 경우 SHAEF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파리의 독일군을 단독으로 공격하라고 명령하겠다고 위협했다.[4]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실행된 이후, 점령자인 독일 국방군과 그 괴뢰인 비시 프랑스에 대한 "프랑스국" 국내의 레지스탕스 운동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졌다. 북아프리카의 알제에 위치한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는, 독자적인 군대인 프랑스 해방군/Armée française de la Libération프랑스어[40] 및 레지스탕스의 통합 조직인 전국 저항 평의회(Conseil National de la Resistance, CNR)와 그 산하의 프랑스 국내군(FFI)을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전국 저항 평의회는 우파에서 좌파까지 다양한 세력이 모인 곳으로, 단일 조직은 아니었다.

임시 정부의 대표였던 샤를 드 골은, 전후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임시 정부에 의한 조속한 파리 해방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했으며, 전국 저항 평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좌파 세력이 주도하는 해방을 원하지 않았다[41] 드 골은 연합국군 유럽 전역 최고 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장에게 파리 공략을 서두르도록 여러 번 요청했지만, 아이젠하워의 사령부는 독일군의 저항이 강할 것으로 예상되는 점, 점령 시 파리에 제공할 물자가 방대할 것으로 예상되는 점, 비시 정부의 퇴진을 기다려 프랑스 국민이 임시 정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점 등을 이유로, 파리를 일부 부대로 포위하는 계획을 세웠다[42] 8월 19일에는 미군 제3군 제15군단제79사단이 센 강가에 있는 이브린 주망트라졸리에 도착했다.

독일 측에서는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의 함락은 프랑스의 함락이며, 독일의 패세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말하며[43], 8월 7일 디트리히 폰 콜티츠 보병 대장을 파리 방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8월 11일에는 히틀러는 개인적인 이유로 파리에 걸린 다리를 모두 폭파한 후, 마지막 한 병사까지 싸우라고 명령했지만, 콜티츠 대장은 시내에서의 방어가 무의미하며, 파리 외곽에서의 방어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상관이었던 서부군집단 귄터 폰 클루게 원수도 이를 승인했다[44]

2. 1. 제2차 세계 대전과 프랑스

1940년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는 항복하고, 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샤를 드 골은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 운동을 전개하며 대독 항전을 이어갔다. 프랑스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자유 프랑스군(FFI)과 승리를 뜻하는 V자가 표시된 트럭


1944년 8월 15일, 파리 북동쪽 교외 팡탱에서 1,654명의 남성과 546명의 여성 정치범들이 마지막 독일행 호송대에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남성)와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 (여성)로 보내졌다. 팡탱은 1940년 6월 독일군이 수도로 진입했던 파리의 지역이었다. 같은 날, 파리 메트로, 헌병 및 경찰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다음 날에는 우체국 직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곧 도시 전역의 노동자들이 합류하여 8월 18일 총파업이 발생했다.

8월 16일, 35명의 젊은 FFI 대원들이 게슈타포 요원에게 배신당해 불로뉴 숲의 ''그랑드 카스카드'' 근처에서 열린 비밀 회의에 참석했다가 총에 맞아 사망했다.

8월 17일, 독일군이 도시 주변의 전략적 지점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한 피에르 테탕제 파리 시의회 의장은 파리 군정 장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를 만났다. 콜티츠가 연합군의 진격을 최대한 늦출 의향이 있다고 말하자, 테탕제와 스웨덴 영사 라울 노르들링은 콜티츠에게 파리를 파괴하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다.

2. 2. 오버로드 작전과 연합군의 진격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오버로드 작전)을 개시하여 유럽 대륙에 상륙했다. 연합군은 라인강 쪽으로 후퇴하는 독일군의 전력을 파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파리를 주요한 목적으로 여기지 않았고, 파리 침공이 소모전이 될 것을 우려하여 독일군에게 도시의 완전한 파괴를 지시했음을 알았지만, 문화적, 역사적 가치의 손실을 우려했다. 포위전이 발발하면 파리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많은 식량이 필요하고, 상당한 양의 건물과 인력, 기술공들이 파리 해방 이후에 필요할 것이라 예상되었다.

자유 프랑스의 유명한 장군 중 하나인 필리프 르클레르.


샤를 드 골 장군은 프랑스 제 2부대에게 파리로 진격하라고 명령할 것을 강요했고, 파리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게는 경쟁에 대한 상이자 프랑스의 중심지였으며, 레지스탕스 군은 독일군을 프랑스에서 추방하고 신념 견해가 다른 이들과 결합하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드골은 그의 임시 정부를 지지하기 위해 프랑스 외부에 자유 프랑스군을 조직했으나, 프랑스 내부에서는 드 골의 지도력에 대항하여 좌파가 형성되고 있었다.

8월 24일, 자유 프랑스 장군 클라라크는 미국 육군 사령관 레너드 T. 게로 장군의 명령을 거부하고 선봉대를 파리에 보냈다. 스페인 내전 베테랑들로 구성되었던 9 군단은 미국식 M2 경전차, M4 셔먼 전차들로 무장했고 레이몬드 드론 장군이 이들을 지휘했다.

8월 15일, 파리 북동쪽 교외 팡탱에서 1,654명의 남성과 546명의 여성, 모두 정치범들이 마지막 독일행 호송대에서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남성)와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 (여성)로 보내졌다. 같은 날, 파리 메트로, 헌병 및 경찰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다음 날에는 우체국 직원들도 파업에 동참했으며, 곧 도시 전역의 노동자들이 합류하여 8월 18일 총파업이 발생했다.

8월 16일, 35명의 젊은 FFI 대원들이 게슈타포 요원에게 배신당해 불로뉴 숲에서 총에 맞아 사망했다. 8월 17일, 독일군이 도시 주변의 전략적 지점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한 피에르 테탕제 파리 시의회 의장은 파리 군정 장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를 만났고, 라울 노르들링 스웨덴 영사와 함께 콜티츠에게 파리를 파괴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2. 3. 파리 봉기의 배경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실행된 이후, 독일 국방군비시 프랑스에 대한 레지스탕스 운동이 더욱 활발해졌다.[40] 알제에 위치한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는 프랑스 해방군 및 레지스탕스 통합 조직인 전국 저항 평의회(CNR)와 그 산하의 프랑스 국내군(FFI)을 지배하에 두었으나, 전국 저항 평의회는 단일 조직이 아니었다.[40]

샤를 드 골은 전후 자신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임시 정부에 의한 조속한 파리 해방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41] 그는 연합국군 유럽 전역 최고 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에게 파리 공략을 서두르도록 요청했지만, 아이젠하워는 파리를 일부 부대로 포위하는 계획을 세웠다.[42]

8월 15일, 파리 북동쪽 교외 팡탱에서 정치범들을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와 라벤스브뤼크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 마지막 독일행 호송대가 출발했다. 같은 날, 파리 메트로, 헌병 및 경찰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다음 날에는 우체국 직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 곧 도시 전역의 노동자들이 합류하여 8월 18일 총파업이 발생했다.

8월 16일, 35명의 젊은 FFI 대원들이 게슈타포에게 배신당해 불로뉴 숲에서 총살당했다. 8월 17일, 독일군이 도시 주변 전략 지점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려한 피에르 테탕제 파리 시의회 의장은 파리 군정 장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를 만나 파리를 파괴하지 말라고 설득했다.

독일 측에서는 아돌프 히틀러는 파리 사수를 명령했고,[43] 8월 7일 디트리히 폰 콜티츠를 파리 방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히틀러는 파리에 걸린 다리를 모두 폭파하고 마지막 한 병사까지 싸우라고 명령했지만, 콜티츠는 시내 방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44]

3. 파리 봉기 (1944년 8월 19일 ~ 23일)

노르망디 상륙 이후 연합군이 프랑스 지역을 빠르게 탈환하기 시작하자 독일군은 고립되거나 철수를 시작했고, 친독일계 경찰들은 거리에서 사라졌다. 몇몇 반독일 시위가 일어났고, 무장한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활발히 일어났다. 사기가 떨어진 독일군은 대응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내군은 지역적인 중앙적 지시 없이 경찰서, 마을 회관, 공공기관, 신문사, 그리고 드 빌 호텔에서 활동을 더욱 활발히 했다. 약 20,000명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파리에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이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로 표지판을 파괴하고, 독일 병사들의 자동차 바퀴를 구멍냈으며 통신선을 두절했고, 정유소를 폭발시켰으며, 고립된 독일 병사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부적절하게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전쟁을 하기를 두려워했다.

8월 19일 FFI 봉기. 한 명의 교전자는 아드리안 헬멧을 착용하고 있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스웨덴의 라울 노들링에게 독일군 담당자이자 파리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디트리히 폰 콜티츠와의 협상을 원했다. 8월 19일 이들은 협상을 계속 이어갔다. 레지스탕스군은 서열이 모호했고, 콜리츠는 파리의 일부분을 레지스탕스 대원에게 넘기기로 협의했다. 레지스탕스 대원은 특정 지역에 독일군이 주둔하는 것을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계가 모호한 상황이었고 독일군과 레지스탕스 대원 둘다 그들의 구역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전은 8월 24일에 발족한 후 독일군은 대부분 파리에서 철수하거나 전투를 중지하였으며 다음날 8월 25일경 진격하던 연합군은 파리로 입성했다.

프랑스 전역에서 노르망디 전투가 끝난 이후, 시민들은 BBC와 프랑스 공영 방송인 ''국립 방송''(RN)을 통해 연합군의 파리 진격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1943년부터 RN은 비시 선전 장관 필리프 앙리오의 지휘 하에 파리에서 운영되었다. 파리 해방 4개월 전인 1944년 4월 4일, 프랑스 임시 정부는 알제리에서 자체 RN 방송을 시작했다. 임시 정부는 1944년 8월 22일 해방 기간 동안 파리 RN을 인수했다.[11]

8월 19일, 독일군 차량들이 동쪽으로 후퇴하면서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이동했다. FFI 대원들이 시민들에게 무장하라는 포스터를 미리 벽에 붙여 놓았다. 이 포스터는 파리 시민들의 전면 동원을 요구했고, "전쟁은 계속된다"고 주장했으며, 파리 경찰, 공화국 근위대, 헌병대, 기동 경비대, 예비 기동대(군대를 대체하는 경찰 부대) 및 애국적인 프랑스인("무기를 들 수 있는 18세에서 50세까지의 모든 남성")에게 "침략자에 맞선 투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다른 포스터는 "승리가 임박했다"고 확신하며, 비시 정부 지지자 및 협력자 등 "반역자들에 대한 징벌"을 약속했다. 이 포스터는 "파리 해방 위원회" 명의로, 프랑스 임시 정부와 합의 하에, 그리고 일 드 프랑스의 프랑스 국내군 사령관인 "지역 사령관 롤 대령"(앙리 롤-탕기)의 명령에 따라 작성되었다.

그 후 프랑스인과 독일 점령군 사이에 첫 번째 산발적인 교전이 시작되었다. 적십자의 소규모 이동 부대가 프랑스군과 독일군 부상자를 돕기 위해 시내로 이동했다. 같은 날, 독일군은 파리에 밀가루를 공급하는 제분소에 불을 지르는 기뢰로 가득 찬 바지선을 파팽 북동부 교외에서 폭파시켰다.[7]

8월 20일, 바리케이드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레지스탕스 투사들은 포위를 지속하기 위해 조직을 정비했다. 트럭을 배치하고,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고, 바리케이드 강화를 위해 포장 도로에서 벽돌을 떼어내기 위해 참호를 팠다. 재료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나무 수레를 사용하여 운반했다. 연료 트럭이 공격받아 점령되었다. 민간 차량이 징발되어 위장을 위해 칠해지고, FFI 문장이 표시되었다. 레지스탕스는 탄약과 명령을 한 바리케이드에서 다른 바리케이드로 운반하는 데 사용했다.

교전은 8월 22일에 절정에 달했고, 일부 독일군은 요새를 떠나려 했다. 8월 23일 오전 9시, 숄티츠의 명령에 따라 독일군은 FFI의 거점인 그랑 팔레에 발포했고, 독일 전차가 거리의 바리케이드에 포격을 가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도시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라는 명령을 내렸다.[12]

3. 1. 레지스탕스의 봉기

8월 15일, 파리 전철 직원들이 경찰과 함께 파업에 들어갔고, 16일에는 다른 노동자들도 합류했다.[11] 8월 18일에는 총파업이 파리 전역으로 확산되었다.[45] 8월 19일, 독일군 차량들이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앙리 롤-탕기가 이끄는 프랑스 국내군(FFI)은 파리 시민들에게 무장하라는 포스터를 붙였다.[11] 이 포스터는 파리 경찰, 공화국 근위대, 헌병대, 기동 경비대 등에게 "침략자에 맞선 투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11]

이후 프랑스인과 독일 점령군 사이에 산발적인 교전이 시작되었다.[11] 8월 19일 오전 7시, 파리 시내 레지스탕스가 봉기를 시작했다.[45] FFI는 2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장비는 열악했다.[45] 레지스탕스는 12개의 구청, 우체국 등의 시설을 점거하고 삼색기를 게양했으며, 시테 섬의 파리 경찰청 본부에서는 경찰관들이 이에 호응하여 봉기했다.[46]

8월 20일, 레지스탕스 투사들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포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7] 트럭, 나무, 벽돌 등을 이용하여 바리케이드를 강화했고, 민간 차량을 징발하여 위장하고 FFI 문장을 표시했다.

8월 22일, 교전이 절정에 달했고, 일부 독일군은 요새를 떠나려 했다. 8월 23일, 숄티츠의 명령에 따라 독일군은 FFI의 거점인 그랑 팔레에 발포했고, 독일 전차가 거리의 바리케이드에 포격을 가했다. 히틀러는 도시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라는 명령을 내렸다.[12]

폰 콜티츠


한편, 파리 방위 사령관 콜티츠 대장 휘하의 독일군은 2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대부분 파리 시외에 배치되어 있었고, 시내에는 5~6천 명만이 주둔하고 있었다.[45] 콜티츠는 8월 20일, 스웨덴의 총영사의 제안으로 휴전에 합의했지만,[45] 다음 날 FFI 일부 병사들이 게릴라전을 재개하자, 파리 공습 및 파괴 명령 실행을 경고했다.[48] 히틀러 또한 파리 사수를 명령하며, 발터 모델 원수에게 파리 안팎에서 싸울 것을 지시했다.[49]

3. 2. 독일군의 대응과 휴전 협상

8월 15일, 파리 전철 직원들이 파업에 들어갔고, 16일에는 다른 노동자들도 파업에 동참했다.[11] 8월 19일, 독일군 차량들이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동쪽으로 후퇴하는 가운데, 프랑스 국내군(FFI) 대원들은 시민들에게 무장하라는 포스터를 붙였다.[7] 이 포스터는 파리 시민들의 전면 동원을 요구하며, "전쟁은 계속된다"고 주장했다. 이후 프랑스인과 독일 점령군 사이에 산발적인 교전이 시작되었다.[7] 적십자의 소규모 이동 부대가 부상자들을 돕기 위해 시내로 이동했고, 같은 날 독일군은 파리에 밀가루를 공급하는 제분소에 불을 지르는 기뢰로 가득 찬 바지선을 폭파시켰다.[7]

8월 20일, 레지스탕스 투사들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포위를 지속하기 위해 조직을 정비했다. 8월 22일에는 교전이 절정에 달했고, 일부 독일군은 요새를 떠나려 했다. 8월 23일 오전 9시, 폰 콜티츠의 명령에 따라 독일군은 FFI의 거점인 그랑 팔레에 발포했고, 독일 전차가 거리의 바리케이드에 포격을 가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도시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라는 명령을 내렸다.[12]

4. 연합군의 파리 진격 (1944년 8월 24일 ~ 25일)

독일군 저격병에 대비하는 프랑스군 제2기갑사단 병사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 자주포 옆에 숨는 파리 시민


1944년 8월 24일, 자유 프랑스군 제2 기갑 사단은 전투와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진격이 지연되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 장군 필리프 르클레르는 직속 상관인 미국 제5 군단 사령관 레너드 T. 게로 소장의 명령을 어기고 파리에 선발대를 보냈다.[13] 르클레르는 다음 날 사단 전체가 도착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함께 전달했다. M4 셔먼 전차, 하프트랙, 트럭으로 무장한 제2 기갑 사단의 선발대는 차드 행진 연대의 제9 중대, 통칭 ''라 누에베''(스페인어로 "아홉")였다.[13] 이들은 16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146명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이었다.[13] 제9 중대 사령관 레이몬드 드론 대위는 포르트 디탈리를 통해 파리 중심부로 진입, 오후 9시 22분에 오텔 드 빌에 도착했다.[15] 시청 광장에 진입한 하프트랙 "에브로"는 독일군 사격병과 기관총 부대에 처음으로 사격을 가했다.[16]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고, 피에르 샤페르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제2 기갑 사단의 도착 소식을 알렸다.[16] 샤페르는 성직자들에게 교회 종을 칠 것을 요청했고, 노트르담 대성당과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포함한 몽마르뜨의 교회들이 참여했다.[16]

레이먼드 바튼이 지휘하는 미군 제4보병사단도 다음 날 새벽 포르트 디탈리를 통해 파리에 진입했다.[17] 선두에 선 미국 연대는 프랑스 제2 기갑 부대의 우익을 엄호하고 바스티유 광장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도멘닐 가를 따라 뱅센 숲으로 향했다.[17] 오후에는 영국 제30 공격 부대가 포르트 도를레앙에 진입하여 카를 되니츠 제독의 전 사령부인 라 뮈에트 성을 점령했다.[18]

레지스탕스 그룹은 몽틀레리와 같은 교외 마을에 숨어 있던 연합군 공군 조종사와 다른 병력을 파리 중심부로 데려왔다.

샤를 드 골은 8월 20일 알제를 출발하여 노르망디에 도착,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장에게 임시 정부 지휘하에 있는 제2 기갑 사단을 파리에 진군하도록 요청했다. 아이젠하워는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8월 21일 드골은 아이젠하워에게 서신을 보내 연합군의 파리 파병이 없다면 임시 정부의 권한으로 제2 기갑 사단을 파리로 향하게 하겠다고 밝혔다.[50] 또한 필리프 르클레르 소장은 독단적으로 파리 파병을 결정하고, 미국군에게는 비밀리에 준비를 시작했다.[50]

8월 22일, 프랑스 국내군이 파견한 갈루아 소령의 연락대가 미국 육군오마 브래들리 대장이 있는 제12군 집단 사령부에 도착하여 파리의 상황을 알렸다. 그러나 이 정보는 드골 측근의 공작에 의한 거짓이었다.[51]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는 이 정보를 믿고, 제12군 집단 지휘하에 있는 미국군 제1군제5군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제5군단에는 프랑스 제2 기갑 사단도 소속되어 있었다. 영국군 버나드 몽고메리 대장에게도 부대 파견 요청이 있었으나, 몽고메리는 지휘권 문제로 이를 거부했다.[52]

제5군단 사령관 레너드 T. 제로우 소장은 파리 진격 부대를 북방 부대와 남방 부대로 나누었다. 북방 부대는 아르장탕 동부 세 (프랑스)(Sai, Orne)에서 랑부이에를 거쳐 베르사유로, 남방 부대는 알랑송에서 샤르트르를 거쳐 파레조로 진격하는 경로였다.[54] 파리 입성은 제2기갑사단이 먼저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미군의 공헌을 나타내기 위해 제38기병중대도 동행했다.[52] 8월 23일 오전 6시 30분에 진군이 시작되었고, 양군은 프랑스인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53]

한편, 파리에서는 프랑스 국내군과 방위군에 의한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대체로 휴전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전 11시, 콜티츠 대장에게 히틀러로부터 파리 방어, 폭동 진압을 명령과 "파리는 폐허 이외의 모습으로 적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라는 "파리 폐허 명령"이 도착했다.[55] 같은 날 정오 무렵, BBC에서 "파리 해방"의 임시 뉴스가 흘러나왔으나, 곧 오보라고 정정되었다. 이것은 연합군의 진군을 독촉하기 위한 프랑스 국내군 런던 본부에 의한 공작이었다.[56]

북부 부대의 진군은 프랑스인과 신문기자들의 환영으로 지연되었고,[54] 8월 24일 오전 7시경에는 남부 부대와 교차하여 극심한 교통 체증을 초래했다.[58] 게다가 르클레르 부대가 향했던 아르파종과 파리 사이에는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 진지가 있어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제2 기갑 사단이 파리 진군 기간에 입은 손실의 대부분은 이날 발생했다. 프랑스인들의 격렬한 환영,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 그리고 진군 경로 문제등으로 인하여, 이날의 진군은 매우 짧았지만, 남부 부대 측은 파리까지 3마일에 근접해 있었다.[59]

4. 1. 자유 프랑스군과 미군의 진격



1944년 8월 24일, 자유 프랑스군 제2 기갑 사단은 전투와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진격이 지연되었다.[13]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 장군 필리프 르클레르는 직속 상관인 미국 제5 군단 사령관 레너드 T. 게로 소장의 명령을 어기고 파리에 선발대를 보냈다.[13] 르클레르는 다음 날 사단 전체가 도착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함께 전달했다. M4 셔먼 전차, 하프트랙, 트럭으로 무장한 제2 기갑 사단의 선발대는 차드 행진 연대의 제9 중대, 통칭 ''라 누에베''(스페인어로 "아홉")였다.[13] 이들은 16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146명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스페인 공화주의자들이었다.[13] 제9 중대 사령관 레이몬드 드론 대위는 포르트 디탈리를 통해 파리 중심부로 진입, 오후 9시 22분에 오텔 드 빌에 도착했다.[15] 시청 광장에 진입한 하프트랙 "에브로"는 독일군 사격병과 기관총 부대에 처음으로 사격을 가했다.[16]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고, 피에르 샤페르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제2 기갑 사단의 도착 소식을 알렸다.[16] 샤페르는 성직자들에게 교회 종을 칠 것을 요청했고, 노트르담 대성당과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포함한 몽마르뜨의 교회들이 참여했다.[16]

레이먼드 바튼이 지휘하는 미군 제4보병사단도 다음 날 새벽 포르트 디탈리를 통해 파리에 진입했다.[17] 선두에 선 미국 연대는 프랑스 제2 기갑 부대의 우익을 엄호하고 바스티유 광장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도멘닐 가를 따라 뱅센 숲으로 향했다.[17] 오후에는 영국 제30 공격 부대가 포르트 도를레앙에 진입하여 카를 되니츠 제독의 전 사령부인 라 뮈에트 성을 점령했다.[18]

레지스탕스 그룹은 몽틀레리와 같은 교외 마을에 숨어 있던 연합군 공군 조종사와 다른 병력을 파리 중심부로 데려왔다.

샤를 드 골은 8월 20일 알제를 출발하여 노르망디에 도착,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장에게 임시 정부 지휘하에 있는 제2 기갑 사단을 파리에 진군하도록 요청했다. 아이젠하워는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8월 21일 드골은 아이젠하워에게 서신을 보내 연합군의 파리 파병이 없다면 임시 정부의 권한으로 제2 기갑 사단을 파리로 향하게 하겠다고 밝혔다.[50] 또한 필리프 르클레르 소장은 독단적으로 파리 파병을 결정하고, 미국군에게는 비밀리에 준비를 시작했다.[50]

8월 22일, 프랑스 국내군이 파견한 갈루아 소령의 연락대가 미국 육군오마 브래들리 대장이 있는 제12군 집단 사령부에 도착하여 파리의 상황을 알렸다. 그러나 이 정보는 드골 측근의 공작에 의한 거짓이었다.[51]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는 이 정보를 믿고, 제12군 집단 지휘하에 있는 미국군 제1군제5군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제5군단에는 프랑스 제2 기갑 사단도 소속되어 있었다. 영국군 버나드 몽고메리 대장에게도 부대 파견 요청이 있었으나, 몽고메리는 지휘권 문제로 이를 거부했다.[52]

제5군단 사령관 레너드 T. 제로우 소장은 파리 진격 부대를 북방 부대와 남방 부대로 나누었다. 북방 부대는 아르장탕 동부 세 (프랑스)(Sai, Orne)에서 랑부이에를 거쳐 베르사유로, 남방 부대는 알랑송에서 샤르트르를 거쳐 파레조로 진격하는 경로였다.[54] 파리 입성은 제2기갑사단이 먼저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미군의 공헌을 나타내기 위해 제38기병중대도 동행했다.[52] 8월 23일 오전 6시 30분에 진군이 시작되었고, 양군은 프랑스인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53]

한편, 파리에서는 프랑스 국내군과 방위군에 의한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대체로 휴전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전 11시, 콜티츠 대장에게 히틀러로부터 파리 방어, 폭동 진압을 명령과 "파리는 폐허 이외의 모습으로 적에게 넘겨서는 안 된다"라는 "파리 폐허 명령"이 도착했다.[55] 같은 날 정오 무렵, BBC에서 "파리 해방"의 임시 뉴스가 흘러나왔으나, 곧 오보라고 정정되었다. 이것은 연합군의 진군을 독촉하기 위한 프랑스 국내군 런던 본부에 의한 공작이었다.[56]

북부 부대의 진군은 프랑스인과 신문기자들의 환영으로 지연되었고,[54] 8월 24일 오전 7시경에는 남부 부대와 교차하여 극심한 교통 체증을 초래했다.[58] 게다가 르클레르 부대가 향했던 아르파종과 파리 사이에는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 진지가 있어 격렬한 저항을 받았다. 제2 기갑 사단이 파리 진군 기간에 입은 손실의 대부분은 이날 발생했다. 프랑스인들의 격렬한 환영, 독일군의 강력한 방어, 그리고 진군 경로 문제등으로 인하여, 이날의 진군은 매우 짧았지만, 남부 부대 측은 파리까지 3마일에 근접해 있었다.[59]

4. 2. 독일군의 항복

8월 25일, 미군 제4보병사단 사령관 소장은 에 파리 진출 명령을 내렸고, 르클레르 소장도 제2기갑사단의 본대를 셋으로 나누어 시내로 돌입시켰다.[60] 각 부대는 독일군의 저항과 시민들의 격렬한 환영을 받으면서도 오전 11시 30분에는 제12보병연대가 파리 동남부를 점령했고, 제2기갑사단 예하 부대도 에투알 광장, 부르봉 궁전에 도착했다. 제2기갑사단 부대 중 우익으로 진격하던 한 부대는 독일군 사령부가 있는 근처로 진출하여 콜티츠 대장에게 항복을 권고했지만, 이 시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1]

정오, 에펠탑 꼭대기에 시트로 만든 삼색기가 게양되었다. 이 깃발을 게양한 것은 1940년 6월 30일 파리 함락 날에 하켄크로이츠 기를 게양하기 위해 삼색기를 내리라는 명령을 받은 소방관이었다. 동시에 프랑스 국내군 병사 약 200명이 오텔 뫼리스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콜티츠 대장도 항복을 각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정규군인 미군이나 불군에게 항복하는 것은 있어도 프랑스 국내군에게 항복하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61]

오후 1시, 파리의 상황에 짜증이 난 히틀러는 파리 폐허 명령이 실행되고 있는지 최고사령부 작전부장 알프레트 요들 대장에게 질문한 후 "Brennt Paris?(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라고 세 번이나 외치며 장거리포나 V1 비행 폭탄, 공습 등 모든 수단으로 파리를 잿더미로 만들라고 명령[62]했지만, 결국 외부로부터의 초토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다.

오후 1시 10분, 오텔 뫼리스 현관에 자유 프랑스군 중위 등 4명이 들이닥쳤다. 정규군과 조우한 콜티츠는 이를 항복의 기회로 보고, 참모를 통해 카르셰 중위에게 자신의 방으로 오라고 전했다. 카르셰 중위는 사령관실에 들이닥쳐 긴장한 나머지 "독일어를 할 수 있습니까?"라고 독일어로 외쳤다. "귀관보다 조금 더 잘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 콜티츠는 항복할 뜻을 전하고, 사령부원은 무장 해제했다.[63]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오후 3시 30분에 뫼리스 호텔에서 항복했다.[19] 그는 그 후 파리 경찰청으로 이송되어 공식 항복 문서에 서명한 다음, 몽파르나스역으로 이동하여 필리프 르클레르 장군이 지휘소를 설치한 곳에서 파리의 독일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콜티츠 등은 르클레르가 사령부를 둔 파리 경찰청으로 호송되어 항복 문서를 제시받았다. 그러나 그 문서에 있던 르클레르의 직함은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 파리 군정 사령관·제2기갑사단장"이었고, "연합군"은 아니었다. 그러자 그 방에 프랑스 국내군 일드프랑스 지역 부대 대장 대령(통칭 롤 대령)과 프랑스 국내군에 속하는 (COMAC) 공산당 대표 (Maurice Kriegel-Valrimont프랑스어)가 억지로 입실[64]하여 "롤 대령에게도 항복 문서 조인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며 르클레르와 교섭하기 시작했다. 르클레르와 두 사람의 교섭은 잠시 계속되었지만, 결국 롤 대령의 조인 참가가 인정되어 오후 3시 30분에 항복 문서가 조인되었다.[65] 콜티츠가 항복 명령을 각 부대에 발령함으로써 파리 시내의 독일군 부대는 오후 7시 35분까지 대부분 항복했고, 불로뉴 숲에 있는 2600명의 부대만 남게 되었다.

5. 해방 이후

파리, 1944년 오마 브래들리 장군,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마리-피에르 쾨니히 장군과 아서 테더 공군 원수


파리 전투에서 약 800명에서 1,000명의 레지스탕스 전투원이 사망하고, 1,500명이 부상을 입었다.[27] 제2 기갑 사단은 71명이 사망하고 225명이 부상을 입었다. 물적 손실은 전차 35대, 자주포 6문, 차량 111대로, 역사가 자크 모르달에 따르면 "기갑 사단으로서는 상당히 높은 비율의 손실"이었다.[28]

숄티츠는 다른 고위 독일 장교들과 함께 전쟁이 끝날 때까지 런던 근처 트렌트 파크에 억류되었다. 1950년에 처음 출판된 그의 회고록 ''브렌트 파리?''("파리가 불타고 있는가?")에서[29] 숄티츠는 자신을 파리의 구원자로 묘사하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그가 도시를 통제력을 잃었고 히틀러의 명령을 수행할 수단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혐의는 제기되지 않았고, 1947년에 석방되었다.

파리 봉기는 새로 설립된 자유 프랑스 정부와 대통령 샤를 드골에게 임시 프랑스 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위신과 권위를 부여했다. 이는 몰락한 비시 정권(1940–1944)[30]을 대체했고, 골리스트들, 민족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을 새로운 "국가 만장일치" 정부로 끌어들여 정치적으로 분열된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통합했다.

드골은 해방에서 프랑스의 역할을 강조했다.[30] 그는 프랑스 국민이 베네룩스 국가와 독일로 진격하여 "전쟁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프랑스가 "승리자" 중 하나가 되기를 원했고, 1945년 독일과 일본에서 수립될 AMGOT 위협에 의해 새로운 헌법이 강요될 운명에서 벗어났다고 믿었다.

파리가 해방되었지만, 프랑스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드래군 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된 후 프랑스 남부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점령되었으며, 이는 8월 15일부터 9월 14일까지 보주 산맥 남서부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1944년 마지막 몇 달 동안 동부 프랑스의 알자스와 로렌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1945년 초까지 이어졌다.

=== 드골의 파리 입성과 임시 정부 수립 ===

독일군이 프랑스 주둔 독일 최고 군사령부인 ''마제스틱 호텔''에 주둔해 있다. 그들은 군대에 의해서만 포로가 되기를 요청했고, 제2 DB의 대대장 자크 마쉬에게 항복했다.


독일군이 항복한 바로 그날,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인 샤를 드 골은 생 도미니크 가의 전쟁부로 돌아와 파리 시청에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방송으로도 중계되었는데, 드골은 파리가 프랑스군의 도움으로 스스로 해방되었다고 선언하며, 특히 바턴의 제4보병대가 전투에서 수행한 역할을 축소하고 비시 정부를 가짜 프랑스로 일축했다.[20][21] 드골은 연설에서 "파리! 모욕당한 파리! 부서진 파리! 순교한 파리! 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스스로 해방되었고, 프랑스 군대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전체의 지원과 도움을 받아 해방되었습니다."라고 강조하며 프랑스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했다. 또한 드골은 "전쟁의 의무"를 강조하며, 독일 본토로 진격하여 완전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20]

개선문 앞에서 퍼레이드를 하는 드골


다음 날인 8월 26일, 드골은 샹젤리제 거리에서 르클레르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제2기갑사단을 이끌고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승리의 퍼레이드를 펼쳤다.[22] 이 행진에는 최대 200만 명의 파리 시민들이 참여하여 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며, 프랑스가 1998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이와 같은 대규모 군중이 모인 적은 없었다.[23] 다만, 크리용 호텔 지역의 지붕에 남아있던 독일 저격병들이 드 골이 콩코르드 광장에 들어설 때 군중을 향해 총을 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24]

8월 29일에는 미 육군 제28 보병 사단이 ''호슈 거리''를 따라 개선문까지 24열로 행진한 다음 샹젤리제 거리를 내려가는 퍼레이드를 진행했다. 기뻐하는 군중들이 미국인들을 맞이했고, 사단 전체, 병력과 차량이 "프랑스 수도 북동쪽의 지정된 공격 위치로 가는 길에" 파리를 통과했다.[25]

=== 숙청과 사회 혼란 ===

해방 직후, 파리에서는 나치 협력자(콜라보라토르)에 대한 숙청 작업이 이루어졌다.[66][67] 밀리치에 연루된 비시 정권 지지자들은 요제프 다르낭의 돌격대지도자에 의해 설립된 준군사조직에 의해 체포되었고, 일부는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독일군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수평적 협력" 혐의를 받은 여성들은 체포되어 머리카락이 깎이고, 공개적으로 전시되었으며 군중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66]

독일군에 항복을 알게 된 파리 시민들은 점령 기간의 유력자, 프랑스 민병대, 비시 정부 및 독일에 대한 "콜라보라시옹(협력)"의 "콜라보라토르(협력자)" 사냥에 나섰고, 이들에 대한 폭행과 살해를 저질렀다. 독일군 장병의 애인이었던 프랑스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삭발당하고(스킨헤드) 나체에 하켄크로이츠가 쓰여지는 등 사형을 당해 공개 처형되었다.[66]

항복한 독일군 장병에 대한 폭행과 살해가 행해졌고, "독일의 협력자"로 오인되어 폭행 등의 피해를 입는 시민도 다수 있었으며, 그 중에는 레지스탕스 협력자까지 포함되었다.[67] 권력 공백 기간 동안 경찰 기능이 마비되면서, 흥분한 시민들의 혼란은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 전후 처리와 국제 관계 ===

드골은 프랑스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승전국의 지위를 확보하고, 전후 국제 질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독일 점령 지역 분할에 참여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획득했다.

밀리치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여러 비시 정권 지지자들은 게슈타포와 함께 레지스탕스를 사냥했던 요제프 다르낭의 돌격대에 의해 설립된 준군사조직인 해방 후의 숙청인 ''Épuration légale''(합법적 숙청)에서 포로가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독일인과의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수평적 협력" 혐의를 받은 여성들은 체포되어 머리카락이 깎였으며, 공개적으로 전시되었고 때로는 군중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1944년 8월 17일, 독일군은 피에르 라발을 벨포르로 데려갔다. 8월 20일, 독일 군대의 호송 아래, 필리프 페탱 원수는 벨포르로 강제로 이동되었고, 9월 7일에는 독일의 지크마링겐 망명 정부로 이동되었다. 그곳에서 그의 추종자 1,000명(루이페르디낭 셀린 포함)이 그와 합류했다. 그들은 지크마링겐 정부를 수립하고 드골의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페탱은 강제 이송에 대한 항의 표시로 취임을 거부했고, 결국 페르낭 드 브리농으로 교체되었다. 비시 망명 정부는 1945년 4월에 종료되었다.

=== 미군에 의한 프랑스 여성 강간 사건 ===

해방 과정과 그 직후, 일부 미군 병사들이 프랑스 여성들을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연합군의 명예에 오점을 남겼으며, 프랑스와 미국 간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5. 1. 드골의 파리 입성과 임시 정부 수립



독일군이 항복한 바로 그날,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의 대통령인 샤를 드 골은 생 도미니크 가의 전쟁부로 돌아와 파리 시청에서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방송으로도 중계되었는데, 드골은 파리가 프랑스군의 도움으로 스스로 해방되었다고 선언하며, 특히 바턴의 제4보병대가 전투에서 수행한 역할을 축소하고 비시 정부를 가짜 프랑스로 일축했다.[20][21] 드골은 연설에서 "파리! 모욕당한 파리! 부서진 파리! 순교한 파리! 그러나 파리는 해방되었습니다! 스스로 해방되었고, 프랑스 군대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전체의 지원과 도움을 받아 해방되었습니다."라고 강조하며 프랑스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했다. 또한 드골은 "전쟁의 의무"를 강조하며, 독일 본토로 진격하여 완전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20]

다음 날인 8월 26일, 드골은 샹젤리제 거리에서 르클레르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 제2기갑사단을 이끌고 개선문에서 콩코르드 광장까지 승리의 퍼레이드를 펼쳤다.[22] 이 행진에는 최대 200만 명의 파리 시민들이 참여하여 해방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으며, 프랑스가 1998년 FIFA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이와 같은 대규모 군중이 모인 적은 없었다.[23] 다만, 크리용 호텔 지역의 지붕에 남아있던 독일 저격병들이 드 골이 콩코르드 광장에 들어설 때 군중을 향해 총을 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24]

8월 29일에는 미 육군 제28 보병 사단이 ''호슈 거리''를 따라 개선문까지 24열로 행진한 다음 샹젤리제 거리를 내려가는 퍼레이드를 진행했다. 기뻐하는 군중들이 미국인들을 맞이했고, 사단 전체, 병력과 차량이 "프랑스 수도 북동쪽의 지정된 공격 위치로 가는 길에" 파리를 통과했다.[25]

5. 2. 숙청과 사회 혼란

해방 직후, 파리에서는 나치 협력자(콜라보라토르)에 대한 숙청 작업이 이루어졌다.[66][67] 밀리치에 연루된 비시 정권 지지자들은 요제프 다르낭의 돌격대지도자에 의해 설립된 준군사조직에 의해 체포되었고, 일부는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독일군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수평적 협력" 혐의를 받은 여성들은 체포되어 머리카락이 깎이고, 공개적으로 전시되었으며 군중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66]

독일군에 항복을 알게 된 파리 시민들은 점령 기간의 유력자, 프랑스 민병대, 비시 정부 및 독일에 대한 "콜라보라시옹(협력)"의 "콜라보라토르(협력자)" 사냥에 나섰고, 이들에 대한 폭행과 살해를 저질렀다. 독일군 장병의 애인이었던 프랑스 여성들은 머리카락을 삭발당하고(스킨헤드) 나체에 하켄크로이츠가 쓰여지는 등 사형을 당해 공개 처형되었다.[66]

항복한 독일군 장병에 대한 폭행과 살해가 행해졌고, "독일의 협력자"로 오인되어 폭행 등의 피해를 입는 시민도 다수 있었으며, 그 중에는 레지스탕스 협력자까지 포함되었다.[67] 권력 공백 기간 동안 경찰 기능이 마비되면서, 흥분한 시민들의 혼란은 한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5. 3. 전후 처리와 국제 관계



드골은 프랑스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승전국의 지위를 확보하고, 전후 국제 질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독일 점령 지역 분할에 참여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지위를 획득했다.

밀리치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여러 비시 정권 지지자들은 게슈타포와 함께 레지스탕스를 사냥했던 요제프 다르낭의 돌격대에 의해 설립된 준군사조직인 해방 후의 숙청인 ''Épuration légale''(합법적 숙청)에서 포로가 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독일인과의 성관계를 가졌다는 이유로 "수평적 협력" 혐의를 받은 여성들은 체포되어 머리카락이 깎였으며, 공개적으로 전시되었고 때로는 군중에게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1944년 8월 17일, 독일군은 피에르 라발을 벨포르로 데려갔다. 8월 20일, 독일 군대의 호송 아래, 필리프 페탱 원수는 벨포르로 강제로 이동되었고, 9월 7일에는 독일의 지크마링겐 망명 정부로 이동되었다. 그곳에서 그의 추종자 1,000명(루이페르디낭 셀린 포함)이 그와 합류했다. 그들은 지크마링겐 정부를 수립하고 드골의 프랑스 공화국 임시 정부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했다. 페탱은 강제 이송에 대한 항의 표시로 취임을 거부했고, 결국 페르낭 드 브리농으로 교체되었다. 비시 망명 정부는 1945년 4월에 종료되었다.

5. 4. 미군에 의한 프랑스 여성 강간 사건

해방 과정과 그 직후, 일부 미군 병사들이 프랑스 여성들을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연합군의 명예에 오점을 남겼으며, 프랑스와 미국 간의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6. 파리 해방의 의의와 영향

6. 1. 프랑스에서의 의의

6. 2. 국제적 영향

7. 기념 및 문화적 재현

매년 8월 25일, 파리에서는 파리 해방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린다.

2004년 8월 25일, 파리 해방 60주년을 기념하여 1944년 8월 26일과 29일의 퍼레이드를 재현하는 두 개의 군사 퍼레이드가 열렸다. 하나는 프랑스 제2기갑사단을 기념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미국 제4보병사단을 기념하는 것으로, 당시 시대의 장갑차를 선보였다. 룩셈부르크 정원에서는 상원의 후원 아래 재즈 콘서트와 대중 댄스가 열렸다.[31] 같은 행사에서 60년 만에 처음으로 스페인 측의 기여에 대한 존경이 표해졌다. 파리 시장 베르트랑 들라노에는 스페인 생존 참전 용사, 하비에르 로호 스페인 상원 의장, 스페인 정치인 대표단의 참석 하에 센 강변의 앙리 4세 부두에 있는 벽에 기념 plaque을 설치했다.

2014년 8월 25일에는 프랑스 상원이 위치한 룩셈부르크 궁전 근처 생 미셸 대로와 인근 거리에 1944년 8월에 전투원들이 사망한 것을 기리는 plaque이 설치되었다.[32] 프랑스 수도의 모든 지역과 바스티유 광장에서 거리 댄스가 열렸으며, 저녁에는 오텔 드 빌 광장에서 '소리 & 빛' 쇼와 댄스가 펼쳐졌다.[33]

2019년 8월 25일에는 파리 해방을 기념하는 많은 행사가 "라 누에베"의 스페인 병사들의 역할에 초점을 맞췄다. 스페인 공화파 참전 용사의 후손인 파리 시장 안 이달고는 프레스코화 제막식에서 프랑스 역사에서 이 장을 인정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강조했다.[34]


  • '''영화'''
  • * ''파리 해방'' 흑백 영화 (1944)[38]
  • * 조지 스티븐스의 컬러 영화 ''파리 해방'' (1944)은 마지막 시내 총격전, 드골의 개선, 거리에서 체포된 독일군, 승리 행진을 보여준다.[38]
  • *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1966)
  • * ''외교'' (2014)

  • '''다큐멘터리'''
  • * ''파리 해방''(원제: ''L'Insurrection Nationale inséparable de la Libération Nationale'', "국민 봉기는 국민 해방과 불가분의 관계")는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1944년 8월 16일부터 27일까지 비밀리에 촬영한 30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영화는 1944년 9월 1일에 프랑스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7. 1. 영화


  • ''파리 해방'' 흑백 영화 (1944)[38]
  • 조지 스티븐스의 컬러 영화 ''파리 해방'' (1944)은 마지막 시내 총격전, 드골의 개선, 거리에서 체포된 독일군, 승리 행진을 보여준다.[38]
  •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1966)
  • ''외교'' (2014)

7. 2. 다큐멘터리

''파리 해방''(원제: ''L'Insurrection Nationale inséparable de la Libération Nationale'', "국민 봉기는 국민 해방과 불가분의 관계")는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1944년 8월 16일부터 27일까지 비밀리에 촬영한 30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영화는 1944년 9월 1일에 프랑스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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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뉴스 The Lost Evidence – Liberation of Paris History
[3] 간행물 "''Les Cahiers Multimédias: Il y a 60 ans : la Libération de Paris''" http://www.radiofran[...] Gérard Conreur/Mémorial du Maréchal Leclerc et de la Libération de Paris 2007-10-14
[4] 웹사이트 1944: August 25: Paris is liberated after four years of Nazi occupation https://www.history.[...] History.com
[5] 서적 When Roosevelt Planned to Govern Franc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Massachusetts Press 2011
[6]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www.ville-pan[...] Pantin official website 2007-07-07
[7] 간행물 https://wayback.arch[...] Pantin official website
[8] 간행물 "''Allocution du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lors de la cérémonie d’hommage aux martyrs du Bois de Boulogne''" https://web.archive.[...] President Nicolas Sarkozy, French Presidency official website 2007-05-16
[9] 간행물 "... et Paris ne fut pas détruit" https://www.amazon.c[...] L'Élan 2022-12-06
[10] 간행물 "''Wird Paris vernichtet?''" http://www.arte.tv/d[...] Arte/WDR/France 3/TSR 2004-08
[11] 간행물 Journal Officiel des établissements français de l'Océanie https://lexpol.cloud[...]
[12] 간행물 "''Libération de Paris: Balises 1944''" https://web.archive.[...] L'Humanité 2004-08-23
[13] 논문 Portrait d'oubliés. L'engagement des Espagnols dans les Forces françaises libres, 1940–1945 http://journals.open[...] 2011-12-15
[14] 뉴스 Who Liberated Paris in August 1944? http://www.thedailyb[...] 2014-08-24
[15] 서적 Je me souviens du 13e arrondissement éditions Parigramme
[16] 서적 Is Paris Burning? https://books.google[...] Grand Central Publishing 1991
[17] 서적 The Paris Game: Charles de Gaulle, the Liberation of Paris, and the Gamble that Won France https://books.google[...] Dundurn 2014
[18] 서적 Ian Fleming's Commandos: The Story of the Legendary 30 Assault Unit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1
[19] 문서 Citation nee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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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웹사이트 25 août 1944, "Paris outragé! Paris brisé!...Mais Paris libéré!" https://www.ina.fr/i[...] 2019-08-23
[22] 뉴스 Paris Journal; 50 Years After the Liberation, France Toasts Itself https://www.nytimes.[...] 2023-09-03
[23] Youtube France 98 : Nuit de fête sur les Champs-Elysées après la victoire (Archive INA) https://www.youtube.[...] Institut National de l'Audiovisuel 2023-07-20
[24] 웹사이트 75th Anniversary of the Liberation of Paris https://apimagesblog[...] 2023-02-25
[25] 서적 World War II Order of Battle Galahad Books
[26] 서적 Civil Affairs: Soldiers Become Governors https://history.army[...]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Department of the Army 2019-05-22
[27] 서적 The Liberation of Paris – Google Books https://books.google[...] 2011-08-30
[28] 간행물 La Bataille de France 1944–1945 http://www.historyle[...] Arthaud 2007-06-13
[29] 서적 Brennt Paris? Adolf Hitler ... Tatsachenbericht d. letzten deutschen Befehlshabers in Paris UNA Weltbücherei 1950
[30] 웹사이트 1944–1946: La Libération http://www.charles-d[...] Charles de Gaulle foundation official website 2007-06-15
[31] 웹사이트 60ème Anniversaire de la Libération – La Libération de Paris – Sénat http://www.senat.fr/[...] 2015-08-23
[32] 웹사이트 La prise du Sénat – La Libération de Paris http://liberation-de[...]
[33] 웹사이트 Bal de célébration des 70 ans de la libération de Paris sur le Parvis de l'Hôtel de Ville http://www.sortirapa[...]
[34] 웹사이트 Libération de Paris: la ville célèbre les combattants espagnols https://www.lepoint.[...] 2019-08-25
[35] 웹사이트 President Nicolas Sarkozy's speech (English) https://web.archive.[...] French Presidency official website 2007-05-16
[36] 웹사이트 Max Gallo's ceremony (video) https://web.archive.[...] French Presidency official website 2007-05-16
[37] 웹사이트 Ponts et batailles de la seconde guerre mondiale http://www.timbrespo[...] 2015-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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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문서 Liberation de Paris http://gaminsdulux.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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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서적 パリは燃えているか? 早川書房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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